한국고전문학 산책 - 마운 김형범




   Vol-No : 07-18 Author : 마운 김 형범
고시조를 찾아서-12 -백사의 시조 한 수-

update 5/1/2015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정의 대신[병조판서]으로 임금 ‘선조’를 도와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11년) - 1618(광해군10년)]은 ‘오성과 한음’의 두 주인공(이항복과 이덕형)으로 오히려 우리에게 더 잘려져 있다. 오성과 한음은 나이가 5살 차이 이지만 어렸을 때 아주 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어린이용 역사 이야기, 만화로까지도 계속 알려지고 있다.

오늘은 이 이항복의 시조 한 수를 산책하기로 한다.

철령(鐵嶺) 높은 봉(峯)에 쉬어 넘은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山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본들 어떠리


이항복의 자(字)는 자상(子常)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80년 (선조13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정하고 처리했다. 1591년 좌승지로서 송강 정철의 죄를 처리하는데 태만했다는 죄로 좌승지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는 개성으로 호위했고 이어 두 왕자를 평양으로 호위하고 선조는 평북 의주로 모시고 갔다.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자 한음 이덕형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주장했다.
안으로는 나라를[선조]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근왕의 군사를 모집했다. 임진왜란 이래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로서 크게 활약했다.
임진왜란 초에는 명나라의 지원군을 맞아드리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후에는 우의정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0년에는 영의정이 되어 오성부원권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에 다시 좌의정이 되고 1611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은거하였다.
1617년에 부왕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여 폐모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1618년에 함경도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임진왜란과 그 뒷 수습에 힘을 쓴 명신으로서 당쟁 속에서도 어느 한 쪽에 가담하지 않고 그 조정에 힘썼다.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임금,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한 두 명의 군주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왕자와 왕세자 시절에는 도량이 넓고 눈물이 있고 우애가 있고 효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외교에는 능하였으나 형 임해군을 죽이고 동생 영창대군도 죽이고 부왕의 계비, 곧 자기에게 어머니가 되는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폐하려 하였다. 이것을 극력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철령을 넘을 때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 이 시조다.

말 뜻 풀이

철령: 강원도 회양과 예전 함경남도 안변군 사이에 있는 해발 685m의 큰 산마루[재]
고신원루: 임금 곁을 떠난 신하의 원통한 눈물
*임금에게 대놓고 원통하다는 말은 지극히 무엄하다. 영조의 며느리이며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직접 쓴 ‘한중록’은 그 내용으로 보아 원한과 한탄 속에서 쓰여졌으리라 여겨 ‘恨’을 썼으나 가람 이병기 선생이 봉건시대에 감히 이런 ‘恨’자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여 뒤에 ‘閑’ 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구중심처: 아홉겹의 깊고 깊은 임금이 계시는 대궐.

이항복은 많은 야담에서 그의 사람됨됨이를 이미 말해 주고 있듯이 학문을 사랑하고 친구를 좋아하며 대인 관계에서 화목하게 지내려고 애쓴 선비였다. 이 시조는 그의 정치 경력과 인간성을 종합하여야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북청 유배가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광해군 치하의 모든 옥사(獄事), 불의, 패륜, 비리가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그 소재가 ‘철령’, ‘높은 봉’, ‘구름’, ‘고신원루’, ‘비’, ‘구중심처’ 등이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구름이 쉬어 넘는 것이 아니라 구름에 자기의 어렵고 힘든 현실을 감정이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광해군 시절의 중신(重臣) 이항복이 60세를 넘겨 감히 원루라고 표현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조의 전체 분위기는 매우 어둡다. 이항복이 옳고 바르고 밝게 살려고 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조의 깊은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 정조 때 이긍익(李肯翊)이 조선조 태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이항복이 철령 위에 올라서 이 노래를 지었다. 이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도성안의 궁궐에까지 퍼졌다. 궁궐안의 모든 궁인들이 이 노래를 슬프게 부르게 되었다. 어느날 임금[광해]이 연석을 베풀고 궁궐 뒷 뜰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 노래를 듣고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궁인이 사실대로 이항복이 지었다고 곧장 아뢰었다. 임금이 슬퍼하며 즐거워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술마시기를 그만두었으나 끝내 다시 불러올 수는 없었다.

자기를 유배 보낸 장본인인 광해군까지 눈물을 흘리게 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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