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문학 산책 - 마운 김형범




   Vol-No : 07-23 Author : 마운 김 형범
고시조를 찾아서-13 - 한음 이덕형의 시조 -

update 6/5/2015



드라마 ‘징비록’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조선조 선조 25년 (1592년)에 왜(일본)의 수령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고니시 유니나가, 가또오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시키어 15만 대군으로 우리 조선에 쳐들어왔다. 임금 선조는 믿었던 조령 전투마저 패하자 봉진(피난)을 나섰다.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다시 대동강을 넘어 평양으로, 청천강을 지나 중국 명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평안도 압록강변의 의주에까지 밀려 오게 되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왜적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아니다로 싸우던 조정의 신하들은 가족은 내버려두고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 행재소(조정)의 임시 집무실에서 그래도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조정의 일을 보고 있었다.
이 때, 한음 이덕형의 본가에서 한 하인이 이덕형을 찾아왔다. 그 하인은 이덕형의 아내가 왜적들 때문에 돌아갔다고 했다.
가족을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 처절한 심정의 이덕형은 부모님의 안위를 묻는다. 무사히 생존하신다는 답을 듣고 이덕형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한 후 돌아서다가 옆에 동료(이항복)가 있는데도 실신할 정도로 쓰러진다.
양반의 체면은 차리지도 못하고… 이덕형은 양반이기 이전에 순수한 청년 인간이었으리라. 조선조의 양반은 아내와 자식보다는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이 첫째의 의무와 책임이다. 이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임금에 대한 충성이다. 임금을 위한 충성심과 부모님에 대한 효성은 양립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이덕형이나 다른 신하들은 임금(=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자기 본가에 있는 처자식과 부모님은 물론 조부모님까지 내버려 두고 임금님만 따라 다니는 것이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은 북한 공산당이 남쪽으로 쳐내려와서 한국의 온 국민이 남으로 남으로 부산까지 피난 갔지만, 420여년 전의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이 남에서 쳐들어 왔으므로 임금과 조정은 북으로 피난을 갔다.
이번 호에는 이런 엄청난 국난을 겪고 이겨낸 이덕형의 다음의 시조를 산책한다.

큰 잔(盞)에 가득 부어 취(醉)토록 먹으면서
만고영웅(萬古英雄)을 손꼽아 혜여보니
아마도 유령(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단어의 뜻
만고: (1) 아주 먼 옛날 (2) 한 없는 세월
영웅: 재주가 비범하고 용맹이 뛰어나서 대업을 이룬 사람, Hero
혜여보다: 생각해 보다. 헤아려 보다.
유령(劉伶): 중국 진나라 사람. 술을 많이 즐겼음. 주덕송(酒德頌)을 지음
이백(李白):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시인. 자: 태백. 이태백으로 더 알려짐. 시선(詩仙)이라고 함. 두보(杜甫)는 시사(詩史)라고 함.

이덕형 [명종16년 (1561) – 광해군 5년 (1613)]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선조 13년 (1580년) 20세도 되기 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다. 1592년에 예조 참판이 되어 대제학도 겸임했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지중추부사로 일본의 사신 겐소, 야나가와 등과 화전(和戰)을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했다.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빈관으로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1593년에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598년 38세에 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가 되어 전란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고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임금이 된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 5년 (1613년)에 광해군이 적자 아우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모하려는 일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지금의 경기도 양주에 내려 갔다가 죽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현대에는 한국에서 50대 총리도 등장하지만 이덕형은 이미 조선 시대에 40대 영의정으로 등장하였다.
지금은 4,50대가 장년층이지만 조선시대는 손주가 있는 할아버지가 되곤했다. 비록 5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으나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내고 임진왜란 7년동안 임금을 도와 왜적도 물리치고 전란 후의 복구 사업에도 힘을 쏟으며 인생의 고락도 맛보았으며, 말년에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은거 생활을 하며 자연을 벗하며 지냈으니 이 작품도 지을 만하다고 하겠다.

[큰 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취하도록 마시면서
아주 먼 옛날부터 한 없는 세월의 영훙호걸들을 손꼽아 헤아려 보니
아마도 중국 진나라의 유령과 당나라의 이태백과 같은 술을 잘하는 선비들이 내 벗인가 하노라]

다음과 같은 다른 한 수의 시조도 있다.

달이 두렷하여 벽공(碧空)에 걸렸으니
만고풍상(萬古風霜)에 떨어짐 즉 하다마는
지금(至今)히 취객(醉客)을 위하여 장조금준(長照金樽)하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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