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문학 산책 - 마운 김형범




   Vol-No : 07-30 Author : 마운 김 형범
고시조 산책 -14 - 오리 이원익의 시조 -

update 8/1/2015



한국 경기도 시흥에 오리로란 거리가 있다.
이것은 십리, 이십리의 오리가 아니고, 또 닭, 오리 등의 가축 이름도 아니다. 조선 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의 세 임금 아래에서 영의정을 지냈던 이원익 (李元翼)의 호 오리(梧里)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미국에서는 주 이름, 시 이름, Town 이름, 산 이름, 강 이름은 물론 거리 이름, 또 심지어는 회사 이름에까지 많은 사람의 이름이 쓰이고 있다. 인간을 극히 중시하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주 이름은 Washington주, 시 이름은 Newton 시, Town 이름은 Franklin, 산 이름에도 Washington, 강 이름은 Charles, 거리 이름은 Quincy, 회사 이름은 Ford 가 있다.
한국은 사람 이름, 지명(地名), 산 이름, 강 이름, 거리 이름 등이 그래도 확연히 구별되어 있다고 본다. 한국에는 거리 이름에는 간혹 사람의 호가 쓰인 예가 퇴계로, 도산로 등이고 시호는 임금의 이름이지만 세종로가 있고, 충무로, 충정로 등이고, 사람의 성 같은 것은 을지로가 있다. 도시 이름으로는 통영이 충무가 되었다가 다시 통영이 된 경우다. 얼마 전에는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의 이름을 딴 거리가 부산에 생겼다고 한다. 이것은 특이하게 본명을 쓴예가 아닌가 한다.
이번에는 임진왜란 때 평안도 관찰사로서 왜적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운 오리 이원익의 시조를 산책하기로 한다.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事)인들 가는 춘풍(春風)매여 두며
탐화봉접 (探花蜂蝶)인들 지는 고즐 어리하리
아무리 근원(根源)이 중(重)한들 가는 님을 어이리

단어, 어구의 뜻
녹양: 푸른 버들
천만사: 천만 개의 실 (가지가 천만 개의 실같이 늘어진 모양)
탐화봉접: 꽃을 즐겨 찾는 벌과 나비
지는: 떨어지는
고즐: 꽃을 곶>꽃 (ㄱ이 ㄲ으로 발음되는 현상을 경음화 현상이라고 함)
어리하리[어이리]: 어찌 하리? (의문형 어미)
이원익 (1547 (조선 명종2년)-1634 (조선인조 12년))
조선조 태종의 5대 손인 왕족이다.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문충(文忠)이다. 1564년 17세에 생원 (生員)이 되었고 1569년 (선조2년) 22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다. 여러 내직(內職)과 외적(外職)거쳐 1591년 44세에 대사헌, 호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 순찰사가 되어 임금 선조의 의주에로의 피란 길을 앞장 서서 안내 인도했고, 군사들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1593년 왜적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탈환해 공을 세워 평안도 관찰사와 순찰사를 겸하다가 1595년에 우의정에 올라 왜적을 물리치는 작전의 큰 임무를 맡았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왜적과 화의를 주장한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가 북인(北人)들의 탄핵으로 유성룡은 삭직되고 이원익은 사직하였다. 1601년에 다시 3도 도체찰사가 되어 임진왜란 이후의 질서 회복에 많이 공헌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 대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1615년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에 풀려나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처형할 것을 명했으나 이원익은 이에 반대했고 광해군은 처형 다하지 않고 유배되었다.
1608년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하여 경기도, 강원도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시행하여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남인(南人)에 속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편에게서도 호감을 받았고 서민적인 인품으로서 오리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시조의 현대어 풀이
푸른 버드나무가지가 천만개의 엄청난 실같이 늘어져 아무리 막으려 해도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으며
아무리 꽃을 즐겨 찾는 수 많은 벌과 나비인들 떨어지는 꽃을 어찌 지지 않게 할 수 있으랴
그러니 아무리 그 근원이 중요하다고 한들 자연의 순리를 따라 떠나가는 임을 어찌 막으리?

이원익은 공(公)과 정(正)이 아닌 것에는 절대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영의정이었던 1598년 (선조31년) 임진왜란 때에 명재상이었던 유성룡이 무소를 받았을 때 그를 적극 옹호 변호하다가 삭직된 일이라든지, 1615년 (광해군7년) 광해군의 폐모청정에 불참하여 유배당한 일이라든지, 그러면서도 인조 반정후 폐위된 광해군의 처형론에 극력 반대하여 처형당하지 않게 한 일들은 이원익의 사람됨과 또 사람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알게 한다. 이 시조는 사람과 사람의 은근한 정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나 그 헤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는 일종의 체념과 달관을 보여준다 .
이런 체념과 달관을 보여주는 이원익의 마음 속을 감상하고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봄바람을 매어 두기 위하여 천만개의 실 같은 버들가지가 되어도 보고 떨이지는 꽃을 못 지게 하려고 꽃을 즐기며 찾아 날아드는 벌과 나비도 되어 보았다.
사람의 정에 관한 한 아무리 조선 시대의 양반이라도 겉으로는 점잖은 척 의연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울고 괴로워하고 서러워했던 것이다. 가사 작품으로는 고공답 주인가(雇工答主人歌)가 있다. 조선 선조 때 허전(許㙉)이 지었다고도 하고 선조가 지었다고도 하는 ‘고공가’에 답하는 형식으로 지은 가사다. ‘고공’은 머슴 또는 종을 뜻하는 말이다. 작자는 왕은 상전으로, 영의정은 어른 종에 비유해서 왕인 상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종과 머슴들을 꾸짖고 한편 어른 종의 말도 듣지 않는 상전인 왕을 간하는 내용이다.

‘고공담주인가’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다.
“어화 저 반하야 돌아 앉아 내말 듣소
어찌 한 젊은 사내 헴(헤아림, 생각)없이 다니산다.
마누라 말씀을 아니 들어 보나산다.
나는 이럴만정 외방(外方)의 늙은 토이공밧치고
돌아갈 제 하는 일 다 보았네”
(현대어로 표기를 바꿨다.)



Views: 500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 운동

참여하기 : MORE DETAI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