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5-25   Author : 이 충시
11.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의 관찰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XI Arirang)

newspaper update 6/17/2016



아시아의 동북부에 일만년 전부터 자리잡고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유형 무형의문화재 중에서; 우리민족의 자랑인 NO. II 아리랑의 숨겨진 비밀을 세계역사속에서 비교하며 풀어 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기 바랍니다



서두 ;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제 탐방을 다시 하고자 합니다. 문화제 탐방이 한 전문가가 아닌 제3자로써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노래로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 되었으며,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 되었습니다.
“Arirang” (Korean: 아리랑) is a Korean folk song, often considered as the unofficial national anthem of Korea. In December 2012, South Korea’s submission of the song was inscribed on the 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program by UNESCO.
본문에서는 아리랑의 유래, 그 특징, 역사배경, 종류, 아리랑이 주는 뜻 그리고 민족사와 얽인 사항을 관찰하는 전국의 지방별 탐방이 되겠습니다.


11-1. 아리랑의 유래 관찰 (*我離娘 由來 觀察/ Arirang Origin Survey).


     

*아리랑을 한문으로 표기한 자료를 관찰 하면, 내가 (我), 고향을 떠나(離) 있으면서 외로움과 사랑하는 연인(娘)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 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데서 아리랑이 쓰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Fig.1.은 민족의 전통과 함께 하는 아리랑의 상징성 그림이고, Fig.2.는 이윤하 명창의 정선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세계적인 행사에서 불러졌던 아리랑은 1988년 한국에서, 2014 소련의 Sochi 올림픽 경기장에서의 행사 대표곡이 되었었다.

1-1.아리랑의 유래(我離娘 由來)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아리랑의 어원이라고 누구나 인정하는 그런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것들과 연관지어 그것을 근거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근거들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전혀 논리적이지 않거나 설득력이 적고 제시하는 근거들을 아리랑과 관련된 뚜렸한 증거로 인정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아 보입니다.

공식적으로 아리랑의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86년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 감리교단에서 발간한 영문월간지<한국소식 (Korean Repository)이며 이전까지 [한국휘보]로 번역되어 알려졌었는데 여기에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bert) 가 기록한 악보와 조사내용을 1896년 쓴 기사입니다.

원래 헐버트는 고종이 세운 육영공원이라는 학교의 교사자격으로 입국하였는데 1891년 말경에 조선과의 계약이 끝나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3년 10월경 다시 감리교 선교사 신분으로 입국하여 그 첫날 저녁에 너무 인상적인 노래를 듣고 다음날 아침 미국 Boston지역에 있는 누이에게 알린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라고 기록 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민요 아리랑이 처음 시작된 시기를 1883년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에 머물면서 또는 미국에 돌아가서 조선의 한글(필자가 한글의 관찰에서 10/23/2015에서 소개한적이 있습니다)과 사회풍속, 민요, 역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문과 기사를 쓰고 책을 펴낸 사람이며 조선의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조선에 대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매우 정확히 알린 사람입니다.

아리랑도 그의 조선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기록되었고 외국에 소개되었던 기록이며 별지에서 다시 소개 하겠습니다

1-2. 아리랑의 유래 연구자료 (아리랑 硏究 資料) 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리랑은 19세기 중기에 불렸다고 하며. 20세기 초에는 〈아라렁〉, 〈아령타령〉 또는 〈아리랑 타령〉이란 노래제목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26년에는 나운규의 영화 주제곡으로 탄생한 ‘아리랑’이 편곡되면서 부터이다. 나운규의 영화주제곡 ‘아리랑’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민요풍의 유행가로 현존하는 아리랑 노래 가운데 가장 대표적 아리랑으로 재구성 되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아리랑이다.

다양한 기록에 나타난 아리랑 노래의 가사, 선율구조, 리듬, 박자와 부점의 유무를 분석함으로 시대별 지역별 아리랑노래 특성을 연구함으로서 아리랑 노래의 음악적 변천을 연구 하고자 했다. 필자는 아리랑의 변천 과정과 계보를 구성하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조선족 아리랑과 고려인, 그리고 북한 아리랑 노래를 중심으로 연구•조사도 하였다. 또한 시대적 아리랑 변천사를 사회적 변화구조에서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주제곡이었던 아리랑까지를 전기 아리랑 시대로, 1926년에서부터 그 이후의 아리랑은 후기 아리랑 시대라고 나누었다.

전기 아리랑과 비교할 때 후기 아리랑의 특성은 독립과 애국이라는 사회적 욕구를 표출하는 두 단어가 가사의 주된 주제라는 점이다. 특히 한반도의 분단 이 후 중국,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아가게 된 한국인들이 불렀던 아리랑을 제보하고 분석함으로서 사방으로 전파되어 변형된(Diaspora) 음악으로서 변천한 아리랑을 보존하고자 했다.


이 관찰에서 현존하는 다양한 아리랑 노래에 나타나는 한국인의 정서와 정체성을 음악 인류학적으로 분석 되었다 보겠고, 전기 아리랑 시대에는 어떻게 전통선율과 리듬이 서양음악과 접목 되었나를 밝히고, 후기 아리랑 시대에는 서로 다른 사회적 환경에 따라서 변화한 아리랑의 음악이 어떻게 한민족의 정체성에 진화를 가져왔는가를 관찰 할수 있다고 본다. 또한 아리랑의 한 종류로 알려진 〈영천아리랑〉이 전라도지역 아리랑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선율 분석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 즉 〈영천아리랑〉은 〈진도아리랑〉의 원형에 가깝다고 보고. 아리랑이란 노래 연구는 음악사적 연구 가치 이외에 민속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945년 이후 냉전시대 종식이전까지 남한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아리랑 연구를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아리랑을 중점적으로 관찰 하고자 합니다.

*Fig. 4.는 2014년 소련의 Sochi 겨울 올림픽 차기유치국인 한국의 송소히양이 Closing Ceremony Korean Arirang Folk Music 을 광장에 울려 누비고 있는 광경이다.

11-2. 아리랑의 특징(Arirang Charicteristic Survey).

아리랑의 특징은 구전민요(口傳民謠)이다
우리나라의 아리랑 민요를 분류하면 남과 북을 통틀어 60여종이고 3천 600여곡이라고 한다 분포 구분을 크게는 3대(진도, 밀양, 정선 아리랑) 혹은 5대 대표곡으로도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기본곡은 같이하고 후렴은 지방색에 맞추어 달리 부르는 것이 통상이다

아래는 서울 경기의 표준 아리랑으로 한글, 영어 그리고 그 뜻을 영어로 해설했다




Fig.5.는 New York Philharmony 악단이 North Korea 평양을 방문해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광경이다.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정서에 적합하기 때문에 남녀 노소를 초월하고 지방색과 국가를 초월해서 애창(愛唱) 되고 있다. 조선말기 일제 강점기에는 겨례의 울분과 심정을 표현하는 유래가 많다. 지방에 따라 약 3,600종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본조의 아리랑과 구분하기위해 아리랑 앞에 지방명칭을 붙인다.


맺음말


아리랑은 한민족(韓民族)과 정서적으로 고락을 함께 해온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일뿐 아니라 지난 300년 동안 슬플 때와 기쁠 때 불러왔던 정신적인 동반자 역활을 해왔다.
예로, 슬픔의 이야기가 서린 서울 돈암동에서 정능고개를 넘을 때, 또 일제의 압박에 못이겨 고국을 떠나던 애국자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여이던 고갯 길 , 여기에서 1926년 아리랑을 촬영한 이후 아리랑 고개로 불러지게 되었다고 하며 조국을 떠나 일본, 중국, 미국, 소련 그리고 저멀리에서도 이 노래는 위안의 동반자였다고 보여지며 지방마다 전설적인 고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떠돌이라도 반드시 고향에 돌아 온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믿어 왔다고 합니다. *7월호에는 아리랑 지방 탐방에 나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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