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8-28   Author : 이 충시
11-2.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의 시대성 유래 관찰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XI-II Arirang)

newspaper update 7/15/2016



아시아의 동북부에 일만년 전부터 자리잡고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유형 무형의문화재 중에서; 우리민족의 자랑인 NO. II 아리랑의 숨겨진 비밀을 세계역사속에서 비교하며 풀어 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기 바랍니다



서두 ;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제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노래로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 되었고, 2012년 12월에 셰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 되었습니다. 이제 아리랑은 한민족 뿐이 아닌 세계인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고 있다.
“Arirang” (Korean: 아리랑) is a Korean folk song, often considered as the unofficial national anthem of Korea. In December 2012, South Korea’s submission of the song was inscribed on the 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program by UNESCO.
앞으로는 시대적변화 관찰, 어원(語源)에 의한 관찰 및 지리적조건에 의한 유래를 관찰하겠으며, 본문에서는 아리랑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유래, 그특징 및 역사배경이 주었던 한민족과의 정체성에 동반한 사항을 관찰하고자 합니다




11-2. 아리랑의 시대성 변화관찰(*我離娘 時代性 變化 觀察/The Arirang Musical Feature Survey).


오늘날 아리랑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리랑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리랑은 Fig.1.과 같이 어쩌면 한민족(韓民族)의 정체성과 함께 왔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대적 변화관찰에서 고대시기의 유사근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부터 시작하였다고 보아진다.


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26년의 나운규의 영화 주제곡으로 탄생한, 주제곡 아리랑이, 편곡되면서부터로 보아진다. 나운규의 영화주제곡 아리랑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민요풍의 유행가로 현존하는 아리랑 노래 가운데 가장 대표적 아리랑으로 재구성 되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아리랑이다. 또한 앞으로, 시대별 지역별 아리랑 노래의 특성을 연구함으로서, 노래의 음악적 변천을 연구하고자 하며, 본문에서는 아리랑의 변천 과정과 계보를 구성하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조선족 아리랑과 고려인 아리랑, 그리고 북한 아리랑 노래도 연구•조사 하고자 합니다. 또한 시대적 아리랑 변천사를 사회적 변화구조에서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주제곡이었던 영화주제곡 아리랑 까지를 전기 아리랑 시대로, 1926년에서부터 그 이후의 아리랑은 후기 아리랑 시대라고 나누었다.
노동(勞動)과, 유희(遊戱)성격을 띄웠던 전기 아리랑과 비교할 때 후기 아리랑의 특성은 독립(獨立)과 애국(愛國)이라는 사회적 욕구를 표출하는 두 단어가 가사의 주된 주제라는 점이다. 특히 한반도의 분단 이 후 중국,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아가게 된 한국인들이 불렀던 아리랑을 채보하고 분석함으로서 아리랑이 음악으로서 민족의 정체성과 함께 변천했음을 관찰하고자 한다.


2-1. 아리랑의 시대적 유래 관찰(時代的 由來 觀察/Time Survey for Arirang)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없는 곳이 없다.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리랑이다.
옛날부터 아리랑은 양반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평민들이 지어 부르고 어깨 너머로 배워 부르고 했던 백성들의 노래, 즉 민요(民謠)인 것이다.
아리랑은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에서 수천 년 전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하여 연구논문이 나오며 실재 근거될만한 자료가 발굴되고 있으며 필자는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고만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뚜렸하게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로 보고 싶습니다.
Fig.2.와 같이,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주제곡이었던 아리랑 까지를 전기 아리랑 시대로, 1926년에서부터 그 이후의 아리랑은 후기 아리랑 시대라고 나누인다

1). AD.1,145-1,310: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김지연(金志淵)의 알영(閼英) 설에서-

2). AD.1,790: 아리랑이 처음 기록된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있는 ‘농부사(農夫詞)’의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물론 이 말이 지금 불리고 있는 민요 아리랑의 모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아리랑과 비슷한 후렴구가 조선 후기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별지에 설명이 따르겠습니다-

3). AD. 1,865-1,872:아리랑이 불려지기 시작한, 보다 구체적인 시기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복궁 증축(增築)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역을 하던 사람들이 원납전(願納錢)을 강요받고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시키라고 하자 불만이 커갔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차라리 귀가 먹었으 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我耳聾)’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리랑으로 변해 전국적인 민 요에 붙어 아리랑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 AD.1,896: 공식적으로 아리랑의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Fig.3.와 같이,1886년 조선에 입국한 이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 감리교단에서 발간한 영문월간지<한국소식 (Korean Repository)=>이전까지 [한국휘보]로 번역되어 알려졌었었음> 에 미국인 헐버트가 채록한 악보와 조사내용을 1896년 쓴 기사입니다.
원래 헐버트는 고종이 세운 육영공원이라는 학교의 교사자격으로 입국하였는데 1891년 말경에 조선과의 계약이 끝나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3년 10월경 다시 감리교 선교사 신분으로 입국했었습니다.
그는 민요 아리랑이 처음 시작된 시기를 1883년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아리랑은 우리가 지금 흔히 아는 아리랑과는 음악적으로 다른 아리랑이라는 사실! 헐버트 박사는 당시의 아리랑을 가리켜 ‘Ararung’ 이라고 표기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에 머물면서 또는 미국에 돌아가서 조선의 한글과 사회풍속, 민요, 역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논문과 기사를 쓰고 책을 펴낸 사람이며 조선의 교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조선에 대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매우 정확히 알린 사람입니다.
아리랑도 그의 조선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채록되었고 외국에 소개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korea를 매우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우리나라 건국훈장도 받은 사람입니다.

5).AD.1,926: 대일항쟁기 당시, 1926년 10월 1일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기념식이 열리던 날에 서울 종로의 한 극장, 단성사에서는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하였죠.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춘사 나운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아리랑에서는 ‘아리랑’을 주제가로 하고 있었는데요. 이때의 아리랑은 구한말의 ‘구아리랑’이 아닌 나운규가 편곡한 ‘신아리랑’이었답니다.
그리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을 알리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는데, 하지만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이 불온한 가사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개봉 첫날부터 홍보 전단지를 압수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아리랑의 음반이 판매 금지를 당하기도 하였죠. 이후 영화의 주제가였던 ‘아리랑’은 일제 치하의 민족의 고통과 설움을 달래는 노래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6).AD.1,930: 1,930년 중반, 일제는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 등 자신들이 치룰 전쟁의 미화를 위해 ‘비상시아리랑’을 급조하여 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무렵에 만주 땅에 정착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던 우리 민족들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아리랑으로 달랬습니다. 1940년대에 아리랑은 민족말살정치에 의한 희생을 피해갈 수 없었는데요. 창씨개명, 조선어교육 폐지 등의 민족말살정치에 의해 아리랑은 잠시 침체기를 맞은 적도 있었다고 보아집니다.

7).AD.1,945: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우리의 아리랑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한국 군인들이 부르던 아리랑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는 백발의 노병들. 이들은 유엔 참전용사들입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전쟁에 참전한 유엔 참전용사들에게 당시 아리랑은 매우 친근한 노래였답니다. 또한 아리랑이 새겨진 스카프, 손수건, 라이터, 인형도 기념품으로 나왔다고 하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기념품은 ‘ARIRANG SONG’ 이란 제목으로 Fig.1.과 같이, 아리랑 악보와 가사가 실린 스카프였습니다.
7.전쟁이후: 전쟁 이후 김옥심, 이은주 등의 명창들은 구성진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며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리고 Fig.4.와 같이, ‘아리랑’이라는 제목의 대중잡지가 출간되기도 했답니다.
언제나 우리 민족의 감정을 담아주었고 고통과 슬픔을 치유해주었던 민요 아리랑은 1960년대 들어서부터 시위가요의 성격으로 변하였는데요. 가사 내용은 전혀 달랐지만 남녀노소가 모두가 알고 있는 노래였기 때문이었죠


2-2.아리랑의 특징 및 역사배경(特徵 歷史背景/Arirang Historical Background)


Fig.5.와 같이,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있는 ‘농부사(農夫詞)’의 한 구절을 번역하여 소개 하겠습니다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신농후직(神農后稷)이 처음 밭을갈고 김을 매니
민생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려라 징과 북을 울려라
잠깐 말 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 * *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민요 아리랑의 모태라고는 할수 없으나 , 지금의 아리랑과 유사한 후렴이 조선의 후기에도 있었음을 관찰 할수 있겠습니다.

맺음말
어느 때보다도 응원의 열기로 뜨거웠던, 1988년 올림픽, 2002년 월드컵,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등에서 아리랑은 세계인의 멜로디이며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해주었던 아리랑은 민족에게 더 큰 힘이 되었는데요. 특히, 아리랑은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 치하로부터, 전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한국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힘과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민족(韓民族)을 하나로 만든 아리랑, 희망을 노래하는 아리랑. 오늘도 우리는 아리랑을 부르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달의 정정입니다:” N.Y.Philharmony ”가 아니고”New York Philharmonie”입니다. 조언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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