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9-03   Author : 이 충시
11-4,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의 지역별 관찰 미국편(5)호머 헐버트 박사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XI-V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 in USA X-Dr.Homer B. Hulbert)

newspaper update 1/20/2017



아시아의 동북부에 오랜세월 자리잡고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유형 무형의문화재 중에서; 우리민족의 3번째 자랑인 아리랑과 연계된 숨겨진 비밀을 세계역사속에서 풀어 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기 바랍니다


서두 ;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재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구전민요(口傳民謠/Oral folk song))이다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 되었고,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한민족 뿐이 아닌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고 있습다. 11-1,편에서는 그유래를 , 2편,시대성 , 3편, 어원적(語源的/Etymological ) 4,지역별(地域別/Regional) 에서, 4-1 정선 아리랑, 4-2 진도 아리랑, 4-3밀양아리랑 그리고 4-4 김산, 4-5미국분인 헐버트 박사의 아리랑 연계와 한국사랑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11-4-5아리랑의 지역성 관찰-미국편(我離娘 地域性 美國觀察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USA ).

4-5-1. 미국땅에 아리랑을 꽃피우다(美國 我離娘 由來/Rooting of Arirang in USA)
한국 고유의 전통 음악인 “아리랑”이 최근 (2011년 2월 18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된 기쁜소식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하기 대회에서 지지율 82%라는 대단한 지지를 받아 한국의 아리랑이 선정됐다. 선정 과정 중에서 단 한명의 한국인도 없었는데도 1위에 오른 것에 이들은 놀라는 눈치였다고 한다.
선정인들은 듣는 도중 수차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 모두는 처음 듣는 곡이었으며 연주자는 한국의 유명한 유진박이 아리랑을 전자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5-1 한민족의 혼 아리랑의 첫 *채보자 호머 헐버트(韓民族魂 아리랑 採譜 創始者/First Arirang Composer as Soul of Korean by Dr.Homer B. Hulbert )

Dr.Homer B. Hulbert born in 1863 in the city of New Haven, Vermont to parents who were the descendants of Puritans, Hulbert was a man of devout faith, having graduated from Dartmouth College and studied theology at the Union Theological Seminary.

Fig.2.와 같이 아리랑은 이번 연재에서는 호버 헐버트가, 1886년 조선땅 제물포(현 인천항)에 23살의 청년으로 대한제국의 최초의 근대식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청받아 첫발을 딛던 131년전, 객실에 몸을 누인 조용한 밤에 환상의 아리랑 가락을 처음 접하고, 노래소리에 취해 뜻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누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오선악보(五線樂譜)를 그리고 노랬말을 적었는데 한국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고 UNESCO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됬슴은 우연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그는 Vermont, New Heaven에서 태어나 ‘ Dartmouth College(Old name)’에서 수업 받고, New York, ‘Union

Thological Seminary(Old name)’에서 수업중 한국의 초청을 받았으며, 그는 가정교육에서 청교도정신(淸敎徒精神)인 ‘Chara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라는 가훈(家訓)에서 성장했다.

1949년 63년만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왔으나 지친여정을 이기지 못하고 1주일 후에 서거 하셨다. 한평생을 한국에 바친후 한국의 땅에 묻힌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의 아리랑 연계성과 한국사랑의 배경 자료를 관찰하고 그의 숨겨진 애국과 충성심의 배경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Fig.2.에서와 같이 제1회 서울아리랑상 수상자는
’The First Seoul Arirang Award’ 수상자로 Homer Hulbert박사가 선정되어 미국의 Arizona주에 살고있는 손자인 Bruce Hubert (78)씨가 서울 광화문 KT올래스케어 Dream Hall에서 상패와 상금 $10,000을, 2015년 10월 7일 수상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상금을 할아버지가 생전에 펼친 교육, 음악연구활동 및 독립운동 참여등을 펴고 있는 ‘Dr. Hulbert 기념사업회’에 기증하였다. 그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수상받음이 영광이며 아리랑 곡에 악보를 넣어서 이를 토대로 아리랑이 전세계에 전파 될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한다. *채보란 들은곡을 악보로 옮기는일


5-2.한국의 소리음악 아리랑 논문( 韓國音聲音樂 아리랑 論文/The Paper of Korean Vocal Music per Arirang)

헐버트는 한글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있어서도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그는 오늘날 세계의 노래가 된 아리랑을 최초로 작곡(採譜/Compose)한 사람이다.

1896년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한국소식 2월호에 발표하면서 말로만 전해오던 민족의 혼, 아리랑과 군밤타령에 서양 음계를 붙여 작곡(採譜)함으로서 우리나라 음악사에 서양악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 라고 아리랑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한국인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한국인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또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이며 한국인이 노래하면*바이런(Lord Byron)이나 * 워즈워스 (William Worthsworth)같은 시인(詩人)이 된다.’ 라고 하여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120년 전에 예지(豫知)하였다고 보아진다.*Lord Byro:1824-Anglo Scottish & William Worthword:1850- English Romantic Poets.
이 논문은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논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을 국제적으로 최초로 소개한 논문이다. 특히 조선 말기에 외국인들은 조선에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평하였지만 헐버트는 조선에도 훌륭한 음악이 있으며 한민족은 뛰어난 음악성을 가졌다고 극찬했다.

헐버트야말로 조선의 전통음악을 직접 체험하며 학술적으로 정리한, 아리랑과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헐버트 서거 63주년 특집으로 한국의 소리 음악(Korean Vocal Music)을 번역하여 지난 8월 발표하였다.*Ref: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록

5-3. 고종황제를 지키고 헤이그 밀사 협조(高宗皇帝 護衛 & 密使事件/Emperor Gojong and Hague Secret Emissary Affair



그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직전 미국의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 을사늑약을 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백악관과 국무성은 헐버트를 외면하다가* 을사늑약(乙巳勒約/乙巳條約)이 국제적으로 발표 된 후에야 헐버트를 만나주었다. 헐버트는 이러한 미국의 처사에 대해 뉴욕타임스 등에 기고를 통해 루스벨트 행정부를 맹비난하면서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신이 한국을 일본에게 넘기는데 동의 했다고 고백하게 만들었다. 을사늑약에 대한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에 대한 투쟁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헐버트가 유일하다.

**우리 역사책에는 기술되고 있지 않지만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를 위한 특사였을뿐만 아니라 헤이그 특사파견(Hague Secret Emissary Affair)의 중심인물이었다.
고종 황제는 1906년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하여 우리나라 조약 상대국 국가원수들을 방문 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도움을 요청 하도록 했다. 일본은 한국이 헤이그에 누군가를 보낸다면 그는 헐버트라고 믿어 헐버트를 철저히 감시하였다.

그러나 Fig.3.에서와 같이 이들 4사람은 각가 다른행로로 하여,이준열사는 서울을 빠져나갔다. 헐버트도 1907년 5월 미국에 간다는 구실 하에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를 도우면서 그 자신도 헤이그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는 일설도 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조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표현도 합니다. **Ref:(사)헐버트박사 기념 사업회

5-4,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이승만 박사와 회담(The Conference of U.S.-Korean for Korean Independent with Dr Sungman Rhee-Dr.Homer Hulbert in 1942)

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Hulbert (center) and Syngman Rhee (Left), participating in the 1942 Korea Freedom Convention in Washington, D.C. “Salminpilji,” the first textbook published in Hangeul in 1889, means “Knowledge Required for All.” (Independence Hall of Korea)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 이후 일제의 박해로 우리나라를 1909떠나 떠나 미국에 살면서 계속적으로 서재필, 이승만 박사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후 해방을 맞아 먼저 귀국하여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추어 초청을 했다 86세의 쇄약한 몸을 이끌고 63년 전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제물포(현재의 인천항)에 또다시 발을 디딘다.

헐버트박사는 한국 땅을 밟는 것에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만 한 달여의 지친 여정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서거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Fig.4. Directors of the U.S.-Korea Conference Gathered in Ashland,
Ohio, in 1942, in a Campaign to Gain the Approval of the Korean.
헐버트박사의 영결식을 거행하고 헐버트박사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고 하여, 평소 소원한 대로 양화진 에 묻혔다.


*다음편에서는 본편에서 못다한 ,공적(功績)을 추가로 관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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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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