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9-07   Author : 이 충시
11-4,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 의 지역별관찰 미국편(6)호머 헐버트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XI-V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 in USA XI-Dr.Homer B. Hulbert)

newspaper update 2/17/2017



아시아의 동북부에 오랜세월 자리잡고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유형 무형의문화재 중에서 우리민족의 3번째 자랑인 아리랑과 연계된 숨겨진 비밀을 세계역사속에서 Hague평화회의를 중심으로풀어 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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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재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구전민요(口傳民謠/Oral folk song))이다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 되었고,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한민족 뿐이 아닌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고 있습다. 11-1,편에서는 그유래를 , 2편,시대성 , 3편, 어원적(語源的/Etymological ) 4,지역별(地域別/Regional) 에서, 4-1 정선 아리랑, 4-2 진도 아리랑, 4-3밀양아리랑 그리고 4-4 김산, 4-5.미국분인 헐버트 박사와 아리랑 연계 그리고,4-6그와 Hague밀사의 한국사랑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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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 아리랑의 지역성 관찰-미국편(我離娘 地域性 美國觀察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USA ).

4-6-1. 미국땅에 아리랑을 꽃피우다(美國 我離娘 由來/Rooting of Arirang in USA)


위의 Fig.1.에서와 같이 대한제국 왕립영어학교 교사로 초청된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는 1896년 구전으로 내려오던 아리랑을 영문으로 가사와 악보를 담았는데 ‘The Korean Repository’에 ‘Korean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산도 들도 물도 좋네
무얼 싸갖고 여기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Fig.2.는 미국의 엘리 월리엄즈(Elly William)dl 1954 에 아리랑을 ‘Ah Dee Dong’으로 이름하여 음반을 만들어 널리 유럽에 유행시켰다고 한다. 이외에도 흑인가수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의 아리란; ‘Ah Dee Dong Blues’째즈로 전세계에 알려졌고, 네델란드에서는 라 에스텔라( La Esterella)의 아리랑; ‘꼼 베이 메이’란 네네란드어로 그리고 일본가수가 이끄는 폴모리(Paul Mouriat) 악단은 아리랑; ‘Eastern Love Song’으로불려졌으며 이음판은 현재도 현대백화점에서 울려퍼지고 미쓰 코리아 피날래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1896년 미국으로 유학간 3명의 학생이 부른 아리랑을 미국의 인류학자가 채록해 에디슨 원통형 음반에 담기도 했다는데 자료가 정선 아리랑센타에 보관 되어 전해진다고 합니다.

6-2. 아리랑의 첫 가곡자 호머 헐버트와 헤이그 밀사(아리랑 歌曲 創始者 & 海牙密使/First Arirang Composer ,Dr.Homer B. Hulbert & Hague Secret Emissary Affair )

1) 호머 헐버트 (Dr.Homer B. Hubert Person History): 그는 Vermont, New Heaven에서 태어나 ‘ Dartmouth College’에서 수업 받고, New York, ‘Union Thological Seminary(Old name)’에서 수업중 한국의 초청을 받았으며, 그는 가정교육에서 청교도정신(淸敎徒精神)인 ‘Chara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라는 가훈(家訓)에서 성장했다.

2) 호머 헐버트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죽임을 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한다. 단순히 미 개화 국가의 교육을 담당하던 교육자였던 그가 조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인식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1895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 때문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그는 고종의 최측근 역할을 하며 서방 국가와의 외교 및 창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 한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 를 발행 하여 서방 세계에 조선이 처한 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TIMES의 객원 특파원, AP통신의 객원 특파원으로서 약소국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열강들의 암투극을 낱낱이 고발하는 기사를 쓰기도 하였다.

3) 호머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특사(特使)를 자처하다

1905년 11월에는 고종황제의 특사를 자처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 하였고, 을사늑약을 저지해줄 것을 미국 조야에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당시 19개국에서 출간되었던 영문 월간지인 Korea Review를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을 폭로 하였다.

4) 호머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평화화의에 가담하다

헤이그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 하여 조선 독립을 호소하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과 연계하여 1906년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탈환하기 위해 각국 원수들을 방문하는 고종 황제의 특사가 되었다. 1907년 특사 직을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907년 러일의 만주비밀조약으로 러시아의 변태로 본회의 참석이 불가해서 장오(場外) 에서 헤이그에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만나 이들을 도와 7월 10일 언론보도진의 모임인 , peace club에서 일본의 부당성과 한국의 국권 회복에 대해서 연설하고 고소문을 배부했다.

5) 호머 헐버트는 미국에서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 하다.

헤이그 밀사가 실패로 끝나고 고종황제가 퇴위하면서 헐버트 박사는 일본의 박해로 한국에 오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1907년~1945년까지 미국에 살면서 저술, 신문기고, 강연, 회의 참석을 통해 대한 독립을 연설하였는데, 1919년에는 미국 상원 외교의원회에 참석하여 한국에서의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6) 호머 헐버트와 함께 했던 이준열사(李儁 烈士/Yi, Jun Hero)는 병사인가 활복자살인가

이준열사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밀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지 정식 비준서가 없는 조약임을 폭로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장기여독(旅毒)에 정신적 피로와 울분으로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순국(殉國)하셨다고 사료되나 그당시 사항으로 이위종은 기자회견에서 활복자살로 보도됬다고 전해진다

*이준열사는 본명이 순칠(舜七)로 함남북청 출신으로 동생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위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의 우왕을 내쫒자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고 자결(自決)한 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17대 손이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일간지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했기 때문에 태평양 정책이 일어났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7) 인종과 국가를 넘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

한국인들은 타락하고 경멸을 받을 민족이며 훌륭한 일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식수준이 낮기 때문에 독립국가로 존속하는 것 보다 일본의 통치를 받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미국인들은 여러 번 들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꾸며진 이와 같은 비난에 대해 필자는 다음 페이지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특별한 목적은 1907년 11월 17일 밤에 훌륭한 결실을 보았는데 그날 밤 한국은 칼로 겨누어 진채 자신의 독립을 결정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이번에만은 자발적으로 동의하도록 위협을 받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동안 한국이 이토록 위기에 빠지게 된 사건의 추이는 어떠하였으며 미국을 포함한 여러 열강들이 그 비극을 연출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6-2 Homer Hulbert 박사의 한국민을 위한 공적들

1) 교육 육성에 공헌:으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1889년 한글판으로 편찬하여 조선사람들이 세계정세에 무지하다는 것에 착안, 한국인들에게 서방 세계를 알리기 위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환경과 정치, 학문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사민필지를 편찬했다. 또한 1902년에<한국어(The Korean Language)>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우랄알타이어로서의 한국어의 언어학적 위치를 정의하였고, 1905년에는 한국어가 인도 남쪽의 드라비다 지방의 언어와 공통점이 있다면서 <한국어와 드라비다 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 Grammar of Korean and Dravidian)>라는 책을 쓰는 등 언어학자로서도 탁월성을 보여 주었다. 기타 독립신문 발행시 ‘ 띠어쓰기’를 처음고 하시고 심지어 중국의 한문자를 과학적인 한글로 추천하기도 했다.

2) 한국의 음악에 공헌: 1896년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한국소식 2월호에 발표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민족의 혼 아리랑과 군밤타령에 서양 음계를 붙여 채보함으로서 우리나라 음악사에 양악보 시대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 라고 아리랑의 의미를 정의하면서 한국인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한국인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3) 역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얘국자이면서,1905년 한국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800쪽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하였다. 한국사는 단군시대 부터 고종 시대까지 망라하여 한국역사를 상세하고 폭넓게 기술하였다.
헐버트는 한국사의 기초자료는 순전히 한국의 책에서 나왔으며, 15년에 걸쳐 동국통감 등 고서들과 씨름하며 한국사를 썼으며, 장안의 비밀한 사료관에 어렵게 접근하여 당시로서는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말기를 포함한 역사 자료를 확보하였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4) 참 선교사: 그는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에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베풀렀으며, <한영사전> 편찬과 성경번역 사업을 도왔다.

6-3사랑하는 한국땅에 소원대로 편히 쉬시다

*한국인은 미개한 민족이다. 일본에 의해서 통치 받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로운 일이다 라고 망언(妄言) 하는
<러.일 전쟁 직후, 미국 상원의원들과 함께한 오찬에서>회의중, 러일 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항의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1951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追書) 되었다 서울마포
합정역 양화진 묘지에 묻혀 있는 호머 헐버트 박사,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아 1949년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다시 방문 하게 되었으며, 그해 지병을 얻어 한국에서 목숨을 거두게 된다. 외국인 묘원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터 민스터 성당 보다 한국 땅에서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다음편에서도 아리랑및 한국에 공헌하신 미국편이 되겠으며 100세의 아리랑 사랑의 재미 한국분 그리고
찬송가의 곡이된 아리랑등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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