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9-27   Author : 이 충시
11-4,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의 지역별 관찰 러시아 제3편(11) 아리랑의 재발견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IX.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 in Russia 3rd, XI-Rediscovering of Arirang)

newspaper update 7/14/2017



아시아의 동북부에 오랜세월 자리잡고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유형 무형의문화재 중에서 우리민족의 3번째 자랑인 아리랑과 연계된 숨겨진 아리랑을 재발견(再發見) 하여 보고자 합니다
러시아의 제3편입니다 . 독자 여러분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기 바랍니다



서두 ;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재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구전민요(口傳民謠/Oral folk song))이다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되었고,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되었습니다. 아리랑은 한민족 뿐이 아닌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고 있습니다. 11-1. 편에서는 그 유래를 , 2편, 시대성 , 3편, 어원적(語源的/Etymological ) 4, 지역별(地域別/Regional)에서, 4-1 정선 아리랑, 4-2 진도아리랑, 4-3 밀양아리랑 그리고 4-4 김산, 4-5 미국분인 헐버트 박사와 아리랑 연계 그리고 4-6 Hague 밀사, 4-7 미국편, 4-8 미국의종편, 4-9 러시아 1편, 4-10 제 2편, 4-11 러시아 제 3편의 아리랑의 재발견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11-4-11, 아리랑의 지역성 관찰-러시아 3편(我離娘 地域性 再3 蘇聯篇 觀察The 3rd Regional Survey of Arirang in Russia ).

2017년 6월인 지난달1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는 Fig.1.과 같이 ‘러시아 음악의밤’이 열렸는데, 여기에 러시아 3대 국립 오케스트라 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Saint Petersburg Symphony Orchestra) 연주단원들이 아리랑을 비롯한 많은 곡을 연주하였으며 여기에 숨겨진 사연은, 1904년 노-일, 전쟁떼 인천앞 바다에 침몰한 바랴크함(the Bariak Soviet battleship)추모비가 있어 이곳에 푸틴 대통령이 참배하러 왔던 곳이며, 이번 문화교류의 또 다른 의미로는 인천에 영구 귀국한 사할린동포의 위안을 위한 문화교류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2015년, 광복절을 맞아, 국제휴먼클럽은 고(考) 이정운 초대총재 시절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로 10년째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고려인들을 위해 문화대축제를 열어 뜨거운 호응을 얻으면서 민간외교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데, 이에 그해 8월14일부터 17일까지 3박4일동안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의 고려인문화대축제 일정을 러시아 광복사절단으로 참가한 국제휴먼클럽 회원 동행의 이야기를 싣겠습니다.
그 다음은 지난 수십년전의 이곳,알마아타 타시켄트 조선인 및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의
‘집단 망명사건과 그이후의 한민족의 문화 보전을 위한 노력의 자취를 관찰하고자 합니다

11-1.한-러 문화교류에 꽃피운 아리랑(韓-露 ,文化交流中 아리랑/The Aarirang Song in Cultural Exchange Concert between Korea & Russia)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는 Fig.1.과 같이2017년 6월 지난달10일 ‘러시아 음악의밤’이 열렸으며 여기에 러시아 3대 국립 오케스트라 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Saint Petersburg Symphony Orchestra/SPB GASO) 연주단원들이아리랑을 비롯한 많은 곡을 연주하였는데 소속연주자로 구성된 앙상불이 무대에 오르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아코디온 퍼커션으로 구성된 (A musical performance composed of percussion) 연주단이 1,2부로 나누어 연주하는데, 이중 아리랑은 물론, 편곡하여 연주되었다 합니다.

It will be about 20 songs including Tchaikovsky’s “Serenade for the Present”, Rachmaninov’s “Bokalize” and Bizet’s “Carmen Suite for String and Percussion”. SPB GASO arranged Arirang playing.

이날 연주자의 한사람인, 러시아의 고려인 강씨는 고려인 유명 성악가Ludmila Nam (1947-2007).의 수제자(首弟子)라고 합니다. 이 음악회는 인천에 영구 귀국한 , 러시아 사할링동포와 홀로사는 노인을 위해, 마련되어 그간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음악인과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한국음악인이 주로 연주를 들려 주었다 합니다.

러시아의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도 2013년 11월에 방한해 박근해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후에 귀국 직전에 인천을 전격 방문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인천부두앞 Saint Petersburg 광장에 있는Bariak 함(The Bariak Soviet battleship) 추모비를 추모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Bariak 함은 1904년 2월 러일전쟁때 참패하여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함정(艦艇)입니다.

인천시립 박물관에 보관된Bariak 함 깃발(Flag)은 4년간 러시아에서 빌려가 전국 도시를 돌며 전시를 했다고 합니다. 러일전쟁 당시 이함정이 출항했던 Kronstadt 시의Saint Petersburg 광장에는 인천광장이 있다고 합니다. Fig.2.는 1903년 건축된러시아 르내산스형(Russian Renaissance Style)의 영사관이였으나,
러-일전쟁 후에, 다른용도로 쓰여졌으며, 두나라 사이의 깊은인연의 건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1-2 러시아 고려인 대축제의 아리랑에 눈물이(韓民族 大祝祭 아리랑/Arirang in The Kazan Capital City of Tatarstan)

2016년 4월에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수도 캬잔(The Kazan Capital City of Tatarstan)에 아리랑이 울러 퍼지고, 카잔연방대학교에서 한국문화의 날 행사가 개최됐다고 ‘글로벌웹진’ 뉴스 (www.newsroh.com)가 전했습니다. 한국문화의 날 행사는 Fig.3. 와 같이, 한국전통문화공연과 한국영화제 행사로 마련돼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와 한국무용, 송파산대놀이, 사물놀이 공연 등이 펼쳐졌고, ‘개를 훔치는 방법’ 등 한국영화 2편이 상영됐다 합니다.
이번 행사는 한국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카잔연방대학교가 주최 및 주관을 맡았고, 한국의 C.M물산이 후원했습니다.

타타르스탄 민족들 에게 한국을 알리고 이곳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모국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기회가 된 날이였으며, 남은혜 명창이, 충청도의 대표 아리랑인 ‘공주아리랑’을 부르자 객석을 메운 카잔 시민들은 여기저기서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이었다. 타타르스탄 고려인협회 김 루돌프 회장은1989년 한국에, 다녀 온 적이 있는데 , 아리랑을 듣자마자 조국에 대한 그리움 으로 설움이 복받쳤다”며 연신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카잔연방대학교 고영철 교수는 “타타르스탄 전통민요는 5음계로 우리의 아리랑과 흡사한 가락들이 많다. 타타르스탄 민족도 가슴속에 슬픔과 한의 정서가 많아 한국전통 음악과 가락과의 동질성에 마음을 연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고영철 교수는 “매년 이러한 문화교류행사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돼 왔는데, 올해는 러시아연방내에서 한국과의 경제교류협력이 기대되는 타타르스탄공화국 수도인 카잔에서 열리게 된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Fig.4.와 같이, 러시아연방 140여 민족 가운데 러시아인은 타타르인은 4%인 550만명으로 80%인 러시아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Ref: www.newsroh.com

11-3.처참하게 강제이주 당한 고려사람들(强制 移住 高麗人/Koreans Forced to Immigrate)

일제가 학정(虐政)을하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근거지확보를 위해 이지역일대인 만주 및 소련국경을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일본은 간도 참변을일으키자 독립군들을 집중적으로 일대를 공략하기도했습니다 이런상황에 소련은 독일과 한판 승부를 걸고 있는 시점에 극동지역에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개전하는 것은 소련으로 보아 불리한 상황입니다
한인들은 소련내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통합수준이 높던 민족이었고, 밀집한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런 한인사회의 모습은 분할통치(分割統治)를 원하던 스탈린 정권의 방침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는 기근과 전염병 등의 재앙으로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끈질길 생명력을 가진 한인들의 전통적 농업활동인 벼농사와 채소 재배를 그곳에 도입시키려는 의도도 가미되고 있었습니다. 한인들은 그런 스탈린 정권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히틀러는 일본에 강요하다 싶히 참전하여 소련 배후를 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든 것이고, 그래서 소련의 스탈린은 한국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참전개입화근을 사전 발본색원 하자는 차원에서 이지역 한인을 일거에 Fig.4.와 같은 경로로, 하루저녁에 6만명을 열차로 이동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것입니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20여 만명에 이르렀스며, 1860년대 첫 이주 이래 연해주 곳곳에서 한인 마을을 이루며 민족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구 소련에 귀화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비 귀화인들이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당연히 한국말이었습니다. 그만큼 민족성이 강한 한인들이었습니다.

그런 한인들을 스탈린은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한인들은 소련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먼저 강제이주라는 철퇴를 맞아야 했다. 1937년 9월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그것이었다. 스탈린 정권이 왜 한인들을 강제이주시켰는가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구소련 정부는 ‘일본 첩자’로 이용될 우려가 있어 강제 이주시켰다고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1937년 9월과 10월 두달 사이에 20여만명의 한인을 한 명도 빠짐없이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캄차카와 인근 벽지에 거주하던 한인들까지 이주시킴으로써, 하바로프스크 동쪽에 사는 한인은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제이주의 50량 정도의 수송 열차에는 여객칸 1량, 위생보건칸 1량, 식당칸 1량, 유개화차 5~6량 외에 40여 량의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이 달려 있었는데. 한인들은 화물칸이나 가축운송용 차량에 2층 판자 침상과 조그만 난로를 설치해 개조한 차량에 짐짝같이 실려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보통 한 칸에 5~6가구, 25~30명가량의 한인들을 실었으며, 한달 넘게 달려서야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카자흐스탄에 7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 10여만명이 운송되었습니다.

수송 과정에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은 차마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고. 어린이와 노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한 채 달리는 열차에서 죽어갔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은 자식과 어버이의 시신을 달리는 열차에서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제이주 1세대자들에게는 누구나 그런 경험을 겪었고, 그들에게는 지금도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1937년 당시 연해주 일대 한인은 20여 만명에 이르렀으나, 1938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이주한 한인의 수는 18만여 명이었다. 2만여 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 중 상당부분은 강제이주를 반대하다가, 또 수송과정에서, 그리고 현지 정착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강제이주 후 60여 년이 돼서야 러시아 정부는 1993년 4월 강제이주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정치적 탄압, 민족차별을 받아야 했던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했으며, 20여 만명의 한인 가운데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대략 3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강제이주 당시의 참상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스탈린 정권의 폭압적인 강제이주로 빚어진 통한의 역사는 어떻게 갈무리를 지어야 할까. 이들 한인의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어야 했던 희생 가운데도 가장 비극적인 상처로 남아 있어서. 그것은 그들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픔이며,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이해 그 역사의 상처와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역사속에서도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혼(魂)이 담겨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향수를 달래고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Ref:장석흥|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7년 02월 28일 18:06:20

*다음편에서는 Kazahkstan의 Almaty 지역의 조선인 및 1958년 북한, 모스크바 유학생의 ‘집단 망명사건’과 그이후의 한민족의 문화 보전을 위한 숨겨진 노력의 자취를 아리랑문화에서 관찰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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