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9-32   Author : 이 충시
11-4,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의 지역별관찰 러시아 제4편(12) 아리랑의 재발견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 in Russia 4th, XII-Rediscovering of Arirang)

newspaper update 8/18/2017



아시아의 동북부에 오랜세월 자리잡고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유형 무형의문화재 중에서 우리민족의 3번째 자랑인 아리랑과 연계된 숨겨진 아리랑을 재발견(再發見) 하여 보고자 합니다
러시아의 제3편입니다 . 독자 여러분께서는 많은 조언을 주시기 바랍니다



서두 ;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재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구전민요(口傳民謠/Oral folk song))이다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되었고,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되었습니다. 아리랑은 한민족 뿐이 아닌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고 있습다. 11-1,편에서는 그유래를 , 2편,시대성 , 3편, 어원적(語源的/Etymological ) 4,지역별(地域別/Regional) 에서, 4-1 정선 아리랑, 4-2 진도 아리랑, 4-3밀양아리랑 그리고 4-4 김산, 4-5.미국분인 헐버트 박사와 아리랑 연계 그리고,4-6 Hague밀사, 4-7미국편, 4-8미국의종편,4-9 러시아1편, 4-10 제 2편, 4-11 제3편,4-12 제4편으로 아리랑의 재 발견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11-4-11, 아리랑의 지역성 관찰-러시아 4편(我離娘 地域性 再4 蘇聯篇 觀察The 4th Regional Survey of Arirang in Russia ).

‘당신을 위한 아리랑’ 행사로 아리랑이 방방 곡곡에 울려 퍼져 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8.15 광복 72주년 기념행사 준비가 광화문을 위시해서 지방 각지에서 추진 되고 있으며, 러시아 구연방국들의 고려인들도 이날을 기념하며 또한 구러시아 연방국들도 승전일로 같은날, 기념식에서 아리랑의 행사가 진행되며, 다음은 아리랑문화의 정신을 이어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탐방(探訪) 하고자 합니다.



4-1,광복절에 찾아보는 러시아 현충원의 유일한 한국인(顯忠院 柳一韓 韓國人/The only Korean who was buried at the Russia National Cemetery)

백추 김규면 선생은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돼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립묘지,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항일 투쟁의 공로를 인정받은 한 외국인이 안장돼 있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국가의 국민들은 그 인물을 얼마나 기억할까!. 해당 국가의 언론들은 그 인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Fig.1. & Fig.2.와 같이Novode Beach수도원은, 흐루시쵸프 전 서기장,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비롯해 러시아의 대문호Anton Chekhov, Gogol 등 러시아의 국가적인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로 치면 국립 현충원 같은 곳이다. 일반인의 매장은 금지돼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 안장된 한국인은 어떤 인물일까? 선생의 벽면 묘지에는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 참가했다”라는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다. 그 투쟁이란 것은 또 무엇일까!
지난 1933년 구 소련 정부가 선생의 항일 투쟁 경력을 인정한 증명서, 소비에트 혁명 50주년을 맞이한 1967년 국가 유공자 훈장과 함께 수여된 ‘붉은별 메달’. 선생이 1969년 8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뒤, 곧바로 Novode Beach에 안장될 수 있었던 근거들이다.

선생은 1920년대 노령 연해주에서 대한신민단, 독립단 등을 조직해 무장 항일투쟁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 독립운동의 영웅이었다. 1924년 5월 임시정부 교통차장 및 교통총장 대리에 선임되기도 했다. 2002년 한국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당시 몇몇 국내 언론이 이 사실을 전했으나, 그 후에는 선생의 이름을 국내 언론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1921년 이만(Iman in Russia) 전투에서 전사한 독립군 대원들의 장례식 사진과 이에 관한 선생의 수기였다 합니다

(*** 참고; 이만 전투: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는 혁명군인 적군과 황제의 군대인 백군으로 나뉘어 1923년까지 내전에 돌입했다.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일본은 백군을 지원한 반면 독립군은 적군편에 서서 싸웠다. 1921년 12월 초에 우수리 철교 이남에 집결해 있던 백군이 이만을 공격해 오는 것을 필두로 고려혁명의용군대 대원들은 혁명군과 연합하여 백군과 전투를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52명이 전사했으나 겨울철이라 3일 동안이나 매장하지 못해 안타까움은 극에 달했다. 이만 각처의 농민들에 의해 임시로 서산에 눈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독립군들은 1922년 4월 6일, 이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추도회를 가졌다.)

선생은, 이역만리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숨져간 젊은 독립군 대원들의 죽음이 그토록 애절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훗날 누군가 그들의 이름이라도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한명 한명 그들의 이름을 적어서 러시아 극동의 박물관에 맡겼는지도 모르겠다고 전해집니다. 취재를 마치고 나서 백추 김규면 선생 못지않게 젊은 독립군 대원들의 애잔한 사연이 가슴 먹먹하게 기억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내년 8.15때는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봐야겠습니다. Ref:ha6666js@kbs.co.kr

4-2. 한국어를 100년 존속시킨 ‘고려일보’(高麗日報, 韓國語 100年 存續/Koryo Daily, which Maintained Korean language for 100 years)

‘고려일보’(高麗日報, 러시아어: Корё ильбо)는 카자흐스탄(Kajaxstan.)의 알마티에서 발간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국어 신문이다. 1938년 5월 키질로르다에서 공산당 기관지인 ‘레닌 기치’(러시아어: Ленин кич)라는 이름으로 창간하여 1978년 8월에 알마티로 이전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 및 카자흐스탄의 건국과 함께 1991년 5월부터 제호가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발간되고 있다.

발간 당시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 신문으로는 ‘레닌기치’ 이외에 유즈노 사할린스크의 지방 신문인 ‘레닌의 길로’가 있었다. 그러나 ‘레닌기치’는 유일하게 전소련에서 구독할 수 있는 한글 신문이었다. 당시에는 주 6회 발행은 일간신문으로 한인집단거주지인, 타슈켄트•키질로르다•타슈켄트•키질로르다• 두샨베•비슈케크 등지에 지사를 두었다. 한때 4만 부가 발행되던 적도있었으며, 1982년부터 사진식자기에 의한 방법으로 활자를 바꾸어 전신문을 한글로만 제작하였다

소련 다민족 가정의 친선, 국제주의식 통일과 집단주의, 소련의 고려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지면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던 ‘레닌기치’는 구소련이 붕괴됨과 함께 1991년 5월 ‘고려일보’로 제호가 변경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과의 교류가 허용(한러 관계 참조)되면서 많은 기업체와 종교단체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로 인한 직원들의 이직과 재정난 등이 겹쳐 ‘고려일보’는 주 5회 발행되던 것을 주 3회로 줄이고 심지어 1부는 러시아어판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1992년 후반부터는 한글판 1부, 러시아어판 1부를합쳐 주 1회 발행되고 있다. 재소 한인평론가 한진이 주장하듯이 ‘레닌기치’는 재소 한인들의 생활을 진실되게 반영하기 때문에 많은 재소 한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또한 뿐만 아니라 많은 재소 한글시인들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연성용•강태수•김두철•우제국•이은영•정장길 같은 시인들이 그 예이다. 즉, 소련에서 재소 동포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100년 이상 존속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4-3. 한 집단망명 유학생인, 고려인의 한과 긍지( 亡命 留學生, 高麗人 恨& 肯志/ A Group of Asylum Students’s Pride & Han)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 북한 유학생들의 한많은 고려인(소련연방에서 조선인과 구별 하기위해서 구별함)의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한 생을 아리랑, 한국문화 속에서 음미(吟味)해 봅니다.

1951~1958년 북한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을 다녔던한대용•김종훈
•리경진•허웅배•정린구•최국인•양원식•리진황. 이들은 1958년 8월 북한 국적을 버렸다. 당시 소련 전연맹국립영화대학생 10명 가운데 8명이 집단 망명(亡命)한 것이다. 1946년부터 시작된 북한의 유학생 파견은 집단 망명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다 합니다.
이들의 국적은 네다섯번 바뀌었다. 일본 신민, 북조선 인민, 무국적자, 소비에트 연방 공민,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국민. 혁명의 피가 뜨거웠던 젊은 날, 이들은 민주적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이상을 택했다 한다, 그러나 젊은 날의 열정은 현실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파란만장한 생이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 열차의 종착역에 다가설수록 두려움에 꺾여가기도했다.
청년 망명자들은 조국이 아닌 땅에서 노인으로 죽음을(1926-2015)맞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김종훈(83)씨다. 대표적인 고려인 희곡작가 한대용, 그리고 망명 동지들. 그들의 얘기를 듣기 위해 이사실을 땀구한 박유리 기자는 마지막 생존자를 찾아 카자흐스탄 알마티 문화휴식공원 (막심.고리키 공원)으로 갔다

이곳의 8월15일 광복절은 한민족 문화 행사의 날임과 동시에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야외 무대에선 유대인, 아프가니스탄, 체첸, 러시아, 위구르 민족 전통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고려인들의 후예(1937년 Vladivostok에서 강제 이주해온)가 이곳에 모인 것이다 이곳에서 마지막 망명의 생존자인 노인은 김종훈씨였다.

“한국은 내 조국입니다. 어째, 내 조국인가! 광산 김씨의 묘지와 부모님의 묘지, 같이 자란 어린 시절의 친구들, 친척들, 선생님들이 있으니까 내 조국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같은 조국은 아니야. 품에 안겨보지 못했지. 그러나 한반도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싶었고 우리 친구들도 그걸 원했어.”

평생을 작가로, 카자흐스탄의 국립 고려극장 극작가로 일해온 한대용의 단편소설 ‘그 고장 이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모든 일에 시작과 마지막이 중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게야. 죽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 사람이 태어난 곳은 고향이라는데 사람이 묻히는 땅은 뭐라고 하느냐! 거기에도 이름이 있어야 할 거야. 고향이란 말에 못지않게 정다운 말이 있어야 할 거야….”

시대는 개인의 신념과 국가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했다. 한진(망명전 이름은 한대용,망명자 끝 이름을 진으로 토일했다)은 국적을 버리고, 가족을 버렸다. 자신이 저버렸던 선택으로 평생을 결핍 가운데 살며 그리워했다. 결핍과 그리움, 정치적 경계인으로서의 외로움이 그를 끊임없이 글쓰게 했다.

역사는 이기적이어서 성공한 투쟁과 혁명, 승리한 헤게모니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록한다. 역사는 대중적이어서 모두가 공유한 좌절과 패배처럼 다수의 기억을 기록한다. 한진은 경계에 있었고 김일성 개인독재를 비판했지만 성공적 투쟁가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인생 여정에는 많은 상징이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봄과 북한의 혹독한 정치적 겨울 사이에서 고뇌했던 북한 지식인, 소비에트 연방 유학생으로서 첫 집단 망명자, 연해주에서 강제이주한 대다수의 고려인 사이에서 북한 망명자 1세대로서의 고려인, 한반도를 포함해 가장 오래된 공연장인 고려극장의 2세대 극작가, 남한과 북한 모두를 아울렀던 카레이스키 희곡 문학의 대표자. 한진 (한대용)의 인생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역사다. Ref: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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