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NE 과학자 협의회장 이 충시 박사




   Vol-No : 09-49   Author : 이 충시
11-4, 한민족의 무형유산 아리랑 의 지역별관찰, 고려인의 아리랑 로드 귀향길 (15) 관찰 (Scientifically Revealing Thousands of Years of Korean Cultural Secrets. The Regional Survey of Arirang Road of Koryoin /Корё сарам ( XV)

newspaper update 12/15/2017



서두;
한민족(韓民族)의 문화재인 아리랑은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구전민요(口傳民謠/Oral folk song))이다 , 세계에 알려진 한국의 전통낱말 순위중, 3번째 순위로 조사되었고, 2012년 12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UNESCO에 등록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한민족 뿐이 아닌 세계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고 있습니다. 11-1,편에서는 그유래를 , 2편,시대성 , 3편, 어원적(語源的/Etymological ) 4,지역별(地域別/Regional) 에서, 4-1 정선 아리랑, 4-2 진도 아리랑, 4-3밀양아리랑 그리고 4-4 김산, 4-5.미국분인 헐버트 박사와 아리랑 연계 그리고,4-6 Hague밀사, 4-7미국편, 4-8미국의종편,4-9 러시아1편, 4-10 제 2편, 4-11 제3편,4-12, 4-13, 4-14 몽골(蒙古/Mongol) 4-15 고려인(高麗人)의 아리랑로드를 따른 귀향길 관찰입니다.
*현재, 고려인이 아리랑길(Arirang road)을 따라 조상의 고향을 찾는 귀화(歸化)의 행사와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의 후손인 이들을 반기는 아름다운 아리랑길을 재 발견 하고자 합니다


11-4-15 고려인의 아리랑 로드 귀향길(高麗人 아리랑 歸鄕路/Koryoin Home Coming Arirang Road)



“아리랑이 무엇인지,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누누이 들어서--
이것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노래다. 꼭 불러야 하는 노래다”라고 들었으며 ‘아리랑 하면 누구를 떠나 보내고, 그리워 하고 그리고 꿈을 갖는다, 우리는 따로 떨어져서 살고 있어도, 아리랑을 부르고 있으면 할아버지의 고향이라는 한국이 꿈만 같이 그려지고, 한국에간 어머님의 생각에 가슴이 설레인다고 합니다, 슬플때나 즐거울때나 함께 부르며 슬픔을 삭히던 노래, 곧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상징이요 정체성을 갖는 한민족의 애국가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정선아리랑 연구소는 고려인 지역을 순방하며 아리랑 필터담배, 성양 재털이 그리고 색연필등 각종 문방구와 라디오등을 소개해서 우리삶에 깊이 자리잡혀 있음도 보여줄것이라고 합니다

15-1 . 아리랑 로드 6,000 Km ( Arirang Road)


한국인의 러시아 이주는 150년의 이민사로 하와이 첫이민을 1863년으로 보았을 경우이고 고려인이라면 1937년 스탈린 독재시절 정착지인 연해주에서 멀고 먼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강제 추방당한 수난의 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Vladivostok에서 Moscow 까지는 약 9,300Km(약 5,700 Mile) 인데 후진 가축열차로 그곳은 추운 9월에, 40여일을 불충분한 음식과 추위로 17-18만명인 고려인은 도중 어린이와 연약자가 1/5이 죽었으며 이들을 운행중 창 밖으로 버리고 달려가서 중간지점인 150도선의 추운 동토의 땅인 첫정착지인 바스토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황무지며 동토에 땅을 파헤칠 기구도 없고, 갖은것이라고는 수저뿐으로 수저로 토굴을 파고 죽어간 시체를 땅에 묻을수도 없어 시채를 옆에 두고, 함께 겨울을 견디었다고 합니다.

그곳 생활사를 살피면, 청산리대첩의 홍범도 장군은, 극장의 수위로 생을 마감했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선 독립군의 전설인 김경천 장군은 독일농장 잡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그들의 생을 쓸쓸이 마감했다고 합니다
*VladiVostok::동방의 정복이란 두 뜻을 합해서 동방의 지배도시란 뜻이며, 소련극동함데의 사령부가 있던 곳입니다

15-2.고려인 강제 이주 원인은/(高麗人强制移駐 原因/Reason for Forced Migration of Koryoin):


일제의 스파이로 몰려 18만 고려인이 집단으로 강제 이주된 수난사(受難史)는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였고 인류 잔혹사의 엄청난 기록이다. 150년전에 연해주에서 시작된 개척의 뿌리에서 부터, 스탈린시대의 험난한 강제이주였습니다

*역사적으로:한국의 역사와 민족사에서 볼때, 고려인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 민족사에서 고려인은 역사 개척의 선구자들이다. 서기 926년 발해 멸망이후 땅이 비좁은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한민족의 지평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펼쳐준 주역이 그들이다. 고려인들은 1860년대에 연해주 이주를 시작한 지 10년도 안 돼 천리 북쪽 아무르 강변에 첫정착촌을 건설했고 이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서쪽으로의 행진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한인동포들이 스스로를 고려인으로 부르게 된 이유는 사실 그들이 왜 자신들을 고려인으로 부르는지 내력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고려인의 선조는 조선왕조 때 러시아 연해주로 자진 이주한 사람들이다.

1869년 러시아의 프르제발스키라는 유명한 탐험가가 연해주 지역 조선인 정착지를 방문했을 때 고려인은 이미 자신들을 고구려 또는 고려사람을 뜻하는 가우리(Kauli) 로 불렀다는 기록을, 1860년대부터 남겼다고 합니다. 연해주가 옛날 우리 선조인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다는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고려’나 ‘고려인’은 그들의 역사성과 민족 정체성을 알려 주는 한민족의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1917년에 연해주 고려인들이 고려족회(高麗族會)란 이름을 내걸었고 이어서 고려인동맹, 고려적위군, 고려공산당등이고. 러시아어로는 카레이츠(Корё сарам)도 고려사람을 뜻한다.

Fig.2.와 같이 ,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민족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킨 역외개척사의 한 페이지였다. 지금 고려인의 생활무대는 러시아 동단 캄차카 반도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장장 1만2천km에 뻗쳐 있다. 고려인은 인구가 50여만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에 고려인이 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밀집해 사는 곳도 없어서 유라시아 고려인은 대표적인 분산민족으로 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복잡했던 이민사의 구조에서:
차르정부를 무너뜨린 러시아의1917년2월 혁명과 10월 혁명 등 러시아 사회의 격랑기에 고려인 사회도 많은 타격을 받고 변화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10월 혁명이후, 당시 러시아에서는 토지를 분배받고 귀화해 부유하게 사는 고려인을 원호라고 부르고, 귀화하지 않고 소작인이나 고용노동자로 가난하게 사는 고려인을 여호라고 호칭했으며, 원호와 여호는 조선의 양반과 천민의 신분 차이가 심했다. 사는 곳도 달랐고 통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0월 혁명이후 민족운동세력은 비천한 신분인 여호 중심의 좌파와 지주 출신의 부유한 원호 중심의 우파로 양분됐다고 합니다.

좌우로 갈라선 이념적 민족 대립세력의 원조나 불씨가 된 유래를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런 시기에 시베리아와 원동에서는 멘셰비키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의 내전이 터졌다.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열강은 내전에 끼어들어 적군 소탕전을 벌였다. 특히 일제는 원동러시아 지역의 분리 장악을 겨냥해 1918년까지 7만명이 넘는 병력을 파견해 반 볼셰비키 세력인 백군을 지원했다. 결국 부유한 원호들은 백군파에 가담해 일본군과 연결되어 친일화 되었고, 여호들은 볼셰비키 적군파와 연대해 항일 빨치산 투쟁에 가담한 것이다.
역사는 백군이 패배하고 적군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내전이 1922년 10월 적군의 승리로 , 일본군도 연해주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그때 고려인들은 조국이 독립되리라는 희망에 불탔다. 5년간의 내전기간 중에 고려인은 46개 빨치산 부대에 1만여명이 참여했고 민간인을 포함해 2천여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수호 투쟁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공산당 정부에 기여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를 시킨 건 보상 대신 배은망덕의 징벌행위를 내린 것인데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일본군이 철수한 직후 1922년 11월 고려 공산당의 한명세는 연해주에서 고려인에게 민족자치 권한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일제의 침략 음모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 원동지역 공산당은, 오히려 연해주 고려인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내전 중 적군에 충성했던 공적은 무시하고 일부 고려인의 반러 친일행위만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결국 그것이 1937년 강제이주의 원인으로 이어졌다.

고려인들이 한층 더 서럽게 배신감을 맛본 것은 내전 중 혁명군 편을 들면 당신들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공약이였는데 배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15-3.제2의 고향 연해주로 귀향 정착(第2故鄕 沿海州 定着/Return to Marlintime Provinces of Russia)


1985년 소련의 Mikhail Gorbarchev 의 소련연방 해채로 1937년이 정치적인 강제 이주였다면 이번은 경제적인 논리로 비연방국의 고려인이 일자리를 잃고, 인종차별과 약탈의 대상이 되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유태인의 *디아스푸라(Diaspora) 형편과 달리 알려지지 않은 힘겨운 고려인들이었답니다.

*Diaspora:민족의 이산(離散)정책을 의미합니다
1985년 다시 빈손으로 , 48년전에 탓던 횡단 열차를 타고 제2의 고향인 연해주로 와서 1993년 고려인 권리회복의 법안통과로 귀화정착을 시작해서 철수한 소련태평양함대 사령부 기지등의 64만평 토지를 받아서 한국의 대한주택사와 원불교의 지원으로 200채의집을 짓고 년 1000채의 집을 짓고 있으며 주거공간이 해결됐으니 고려인 우정마을에는 고려인들에게 극락이나 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고려인의 국립극동대학 설립(高麗人 國立極東大學 設立/Established Koryo Far East College):독립투사였던 기업인의 자제가 부친의 뜻에 따라, 한국대학인 국립극동대학을 설립하여 현재 250여명의 학생들이 5년과정으로, 어문학(語文學)과, 역사학과 그리고 경제학과를 갖었으며 고등학교의 성적이 우수한 금, 은, 수상의 러시아 학생들도 장학생으로 공부 하고 있는데 Fi.3.에서와 같이 수상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볼수가 있겠습니다.

결론: 아리랑은 고려인에게 고난을 극복하는 소리, 고려인의 삶 및 강제이주의 한을 풀어주는 한민족의 결집(結集)과 인내(忍耐)를 이끌어낸 얘국가 이상의 노래가 아닐련지요.

*다음 연재는 아리랑의 민족인, 고려인의 귀화붐이 일고 있는 ,경기 안산시의 13,000명과 광주 광산구의 3,000명의 귀화(歸化)현항을 관찰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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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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