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紀行) 작가 : 강 순조 (Susie Kim)






   Vol-No : 08-32 Author : 강순조 (Susie Kim)
동유럽 크루즈 와 드라큘라의 발자취를 따라서: 전설인가, 진실인가? (2)

update 8/12/2016



3. 모하치 (Mohacs), 페치 ( Pecs), Hungary

오늘도 우리가 잠든 동안 배는 계속 강을 따라 다뉴브 강의 오른쪽 강변 도시인 모하치에 정박했는데 이곳은 두 개의 전투지로 역사에 남는 곳이다. 첫 번째는 헝가리인이라면 치욕적으로 생각하고 잊을 수 없는 전쟁인 오토만 제국의 침략으로 1526년에 많은 크리스챤이 희생되었고 약 150년 후에는 오토만을 철퇴시키기 위한 피나는 격전의 장소로서 유명하며 오늘날까지도 국가적인 비극의 장소로 기념되고 있다. 오토만 이후에는 독일의 합스부르크가 18세기까지 통치했다. 이 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이 역사적인 공원 안에 세워져 있었다.
1910년의 인구 조사를 보면 수 많은 나라와 전쟁을 겪은 결과로 많은 민족이 얽혀 살았는가를 알수있다.
모하치 지역 인구는 56,909명이었는데 그 중 21,951명이 독일어, 20,699명이 헝가리어, 4,321명이 서비아 어, 421명이 크로에이시아 어를 구사했으며, 9,600명이 그 외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보고이다.

현대에는 이렇게 많은 종족이 사이좋게 어울려 살면서 각자의 특징을 살리고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다. 독일계는 근면하고 이 지역의 포도주 생산을 거의 독점하고 있고, 집시들은 음악과 말과 가죽 제품 등의 거래에 특출하다고 한다. 많은 소수민족의 축제가 있는데 한 예로 크로아티아인의 소수민족 페스티벌은 유네스코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마을을 수호하고 평화스러운 한 해를 빌기 위해 무서운 마스크를 쓴 크로아티아인들이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마을 곳곳을 나흘간 돌아다니는 축제인데 이렇게 해야 한 해를 평화스럽게 지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모하치와 페치 주위에는 약 300개의 작은 마을이 있고, 각 마을의 인구도 겨우 300명 미만인데 우리처럼 슈퍼마켓이 필요없고 온화한 기후로 농작물이나 적은 가축 사육 등으로 거의 자급자족의 생활을 한다고 한다.

4. 페치 (Pecs)

우리는 하선하여 약 45분간 달려 헝가리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인 2세기에 로마에 의해 세워진 페치로 갔다. 가는 도중 도로 옆으로 크나큰 파이프 관이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공산 통치 중 그들의 정책이 실패한 대표적인 한 예였다. 지상으로 발전소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에 더운물을 공급하기 위해 연결된 관인데 이동할 동안 바깥 온도에 의해 물의 온도는 떨어지고 각 가정에 들어올 때 쯤에는 이미 식어 있고, 거기다가 시간 제로 배급되므로 아무리 불편해도 밤중이든 새벽이든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등 효율성이 없는 정책이나 개인의 의견이나 독립성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의 구조에서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절대 권력에 어떤 비판도 제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집단 농장 아니면 당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한 표본이다.

2,000년에 동유럽의 문화 도시로 지정된 페치는 지중해 성의 온화한 기후로 헝가리의 “매디테라니안 시티” 라고도 불리는데, 일 년에 200일 이상이 햇빛으로 아름답고 메섹 산의 남서쪽으로 자리 잡고 있어 헝가리의 제일 포도주 산지인 동시에 농작물과 관광이 주 산업이며, 2-4세기에는 주위의 중요한 기독교도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시는 169,000명의 인구에 35,000명이 대학생인 엘리트 도시이며, 도시 전체가 많은 예술가, 학생, 성당, 모스크, 세라믹 등으로 활기차고 휴양지 같은 분위기가 서구의 어느 도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4세기로 짐작되는 기독교의 공동묘지는 2,000년도에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또한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의 성당(Cathedral)은 교황 죤 폴 2세의 방문 후 대 성당(Basilica)으로 승격되었다.

가는 곳마다 화려한 성당과 모스크는 도시의 중앙에 있었으며 종교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가를 알수 있었고 역사의 변천에 따라 파괴되면 재 건축하고 재건축할 때는 건축양식도 바뀌어 갔다. 세인트 피터와 세인트 폴의 성당만 해도 스테펜 왕 이 1064년에 지었을 때는 네오 로마네스크 였었는데 몽골에 의해 1064년 불에 타서 파괴된 후에 바록 스타일로 재건 되었다가, 15세기에는 고딕 스타일로 지금은 다시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지어져 있다.


이렇게 스테펜 왕 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한 이후 기독교의 문화가 찬란하게 펼쳐진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그 외 특기할 것은 1367 년 헝가리의 첫 대학이 페치 (유럽에서는 다섯 번째)에 생겼고, 1867년에는 시카고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증권 교환소가 문을 열었고, 노벨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 중의 하나이며, 1956년 혁명 후에 공산권 국가 중에서 서구 문명에 제일 먼저 문을 연 국가도 헝가리라고 한다. 헝가리는 GDP가 $14,375로 딴 동 유럽국가들에 비해 부유한 나라이다.




5. 부커바(Vukovar), 크로아티아(Croatia)

다음 날 아침 우리 배는 부카강과 다뉴브강이 합류하는 크로아티아의 동북부의 있는 제일 큰 항구도시인 부커바에 정박했다. 크로아티아는 작은 나라이지만 동서 유럽을 연결하는 교차로에서 수많은 민족과 다른 문화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역활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건축된 많은 여러가지 건축 양식을 자랑하고 있다.

지중해의 중유럽과 발칸의 만나는 지점에 있으면서, 북쪽은 비엔나를 아드리아해 쪽은 이탈리안 스타일의 건축 양식이 주를 이루고 1991-1995년간의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으로 크로아티아의 경제성장에 타격을 받았지만, 오늘의 크로아티아는 유명한 휴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지중해 기후로 일 년 약 2,700시간의 햇빛을 즐길 수 있다고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선호하는 프릿츠빗츠 국립공원은 중부 지역에 있고 16개의 호수와 많은 폭포는 아름답다고 들었으나 우리의 위치와는 너무 먼 거리에 있어 아쉬웠다. 1979년에 유네스코의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크로아티아도 유럽의 모든 국가처럼 소용돌이의 역사를 가졌다. 2세기의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시작해서 11세기에 크로아티아 왕정이 끝나면서, 헝가리 군주의 통치, 오토만 터키의 침공, 합스부르크 왕국의 통치 등을 거쳐 19세기에 들어와 문화적, 정치적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세계 1차대전까지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가 1918년 이웃 왕국인 서비아 와 슬로반과 합쳐 왕국을 만들었고, 1929년에는 유고슬라비아로 재탄생했으나, 많은 정치적 위험을 겪었고 늘 불안정한 사태였었다.

그러다가 유고슬라비아가 프로 나치의 입장에서 지방 공산당 인도자 조셉 티토에 의해 공산 연방국이 되었고 1980년 티토의 사망시 까지 지속되다가,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각각 독립을 선언할 기회를 가졌다.

오늘날의 크로아티아는 유럽의 민주국가로 발전하고 있고, 2007년에 EU 회원국이 되고 2009년 나토의 회원국이 되었다.
서비안, 크롯스, 슬로베니안, 보스니안 모두가 슬라빅이 기원으로 수세기를 서로 사이좋고 평화스럽게 살았으나 거의 400년간의 터키의 점령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특기 할 것은 보스니아와 코소보는 이슬람교로 전환했으나 크로아티아 는 로만 캐도릭, 서비아는 동방 정교 국가로 전환하면서 서로 간 종교와 정치면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오늘날까지도 불안정한 상태이다.

우리 일행은 배 안에서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의를 듣고 부커바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의 영어 음악 프로그램과 간단한 연극도 보았다. 공산치하에서는 서구 문명과 서구인을 격하하는 슬로건으로 학생들을 세뇌 시켰었는데 오늘날은 모두가 제일 외국어로 영어를 배우고 두 번째 선호하는 언어는 독일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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